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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사회와 인간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_고미숙_한국의 근대성을 해부하는 세 가지 매스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고미숙
출판 : 책세상 200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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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각 사회에 ‘필요한’ 주체로 되어 가는지, 혹은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지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_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_443

 

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나’를 만든 것들은 무엇일까? 가정, 학교, 군대, 그리고 사회라는 공동체를 거치는 동안, 나의 ‘주체’를 만들어 낸 요소나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현재의 ‘나’에서 더 나은 아니, 새로운 ‘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껍질을 깨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결국 새로운 ‘나’로 나아가기 위해 알 껍질을 깨는 첫 망치질이다. 저자 고미숙씨는 한국 근대성에 대해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서 그녀는 근대화 이후에 어떻게 ‘한국의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져 왔는지 살펴본다. 그는 한국의 근대성을 해부하기 위해 ‘민족’, ‘섹슈얼리티(여성)’, 그리고 병리학 이렇게 3가지 매스를 들이 댄다.

 

모든 주체들은 이미 견교하게 짜여진 틀 위에서 사유하고 기억하도록 ‘코드화’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것들은 이러한 기억들의 배치를 변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상의 가능성을 최대한 증식하는 것. 이것이 무의식의 심층을 탐사하는 진정한 목표가 될 것이다._75

 

무엇보다도 한국의 근대성을 이야기 할 때 ‘민족’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 뿌리를 알기 위해서 근대성의 태풍의 눈인 민족이라는 초월자가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출현했는지, 그리고 어떤 심리적 기제로 정착 되어 가는지를 추적_14 해 보아야 한다. 오랫동안 ‘민족’이라는 개념은 신성불가침 영역처럼 여겨져 왔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민족은 단군이 세운 순수 ‘단일 민족’이라고 배웠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서 민족 담론은 철저히 인종주의적 관점에 기반하고 있다_52 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개인은 민족이라는 대타자에게 포함될 때만 존재 의미가 부여된다. 일종의 ‘유기체적 전체성론’인 셈인데, 이 논법은 민족주의의 인식론적 기저를 이룬다._43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차이에서 동일성으로, 우주에서 국경 안으로_35’라고 말하고 있다. 즉, ‘민족’이라는 블랙홀은 다양한 차이들과 주체들을 한 점으로 빨아들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 또는 ‘버리거나 없어져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일종의 동일성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타 민족은 멸시의 대상 그리고 적대적인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나 인종차별 문제의 원인도 결국 우리 의식과 몸속에 깊숙이 배어있는 ‘민족주의’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가 부정적인 역할만 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 국민을 하나로 모아 주는 구심점 역할을 했고 그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요즘 한창 인기 있었던 사극 드라마를 생각해 보자. 중국과의 고구려사 문제 이후 ‘주몽’이나 ‘바람의 나라’ 등 고구려와 발해사를 다루는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 졌다. 그 내용은 주로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패권을 둘러싼 대결 관계가 주요 내용을 이룬다. 저자는 이것을 ‘현재화된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대사를 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현재적 욕구, 아니 미래적 기획을 과거에 투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_58 근대화 초기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역사학술 작업도 결국 민족을 위기에 빠뜨린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뒤엎기 위해 저 멀리 고대사를 복원함으로써 제국주의에 맞서고자 했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고대사는 오래된 미래 또는 백투더 퓨처인 셈이다._61

 

저자는 또한 민족 정서라고 불리는 ‘한’에 대해서 의심의 질문한다. ‘한’은 정말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한’은 분명 20세기 초반의 산물이다._61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든 예를 들어보자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은 유학 가운데서도 가장 현세적인 사유체계이다. 죽음 또는 생의 이면에 대한 탐구는 가능한 한 배제하는 담론이라는 뜻이다. 상층에서는 당쟁이 하층에서는 민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이것이 역시 150년간에 걸친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이나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고 왕조 교체가 무시로 일어난 중국에 비해 볼 때 그 파장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고전문학에서 비극을 체험하기란 정말 어렵다. 아니, 해피엔딩이 아닌 소설을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_62

 

‘가을동화’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통속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불치병’, ‘출생의 비밀’, ‘시집살이의 한’ 등은 ‘한’이라는 개념의 변주일 뿐이다. ‘한’이라는 것은 국가의 부재를 통한 상실감이 민족이라는 범주와 정념이 섞여 생성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제 2장에는 ‘여성’이 민족이라는 범주에 편입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배치가 어떻게 변환되는지를 분석한다. ‘여자’는 어떻게 ‘국민’이 되었나? 우리는 보통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여성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존천리 거인욕’이나 ‘남존여비’로 대표되는 유교적 성리학 의 폐쇄적인 성적 욕망이 근대화로 인해 점차 해방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관념 자체가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유목민들에게 여성의 정조는 수치에 해당된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성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목걸이를 하나씩 목에 걸고, 당연히 목걸이의 수가 많을수록 여성의 주가는 올라간다. 이것은 야만일까? 자유일까?_84

 

무릇 천지만물을 살피는 데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고, 사람을 보는 데에는 정보다 묘한 것이 없으며, 정을 살피는 데는 남녀간의 정을 살핌보다 진실한 것이 없는 것이다._이욱, (이언 가운데 이난)

 

근대화 초기 신문 사설을 보면 ‘남녀 평등’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여자의 인권의 보호와 보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생식력, 그것이 지닌 국가적 중요성 때문이다._94 또한 당시 국가장치든, 계몽주의자이든 조혼제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가장 큰 이유는 위생론적 관점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혼을 하면 국가경쟁력이 뒤진다는 것이다._97 여기에는 오직 생식을 위한 성, 가족을 위한 성, 국가를 위한 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욕망의 거세'를 통한 국민으로의 편입이라는 근대 권력의 포획장치_109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매음녀, 삼패기생, 유녀들은 이제 정상적 여성들을 위협하는 ‘타자’_114 로 규정한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운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이 아무리 흘러넘치는 사회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성의 해방은 성이 얼마만큼 표현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표현 되는가 다시 말해 삶의 역동성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에 달려 있다._83

 

제 3장에서는 근대인들의 신체에 대한 표상을 장악하고 있는 근본 메커니즘으로서의 병리학과 기독교의 긴밀한 연관 관계를 탐색한다. 저자는 근대의 성소들로 '목욕탕', '병원', '교회'를 꼽고 있다. 급진 개화파들이 보기에 서구의 문명은 ‘위생과 건강’이라는 표상으로 다가왔고, 그 표상의 거울에 비친 ‘조선의 얼굴’은 악취에 찌들어 말할 수 없이 약하고 병든 모습이었다._135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 이것이야말로 전 구성원을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계몽주의자들의 모토였다. 각 학교마다 ‘운동회’ 붐이 조성되고, 체조가 국가적 종목으로 부상된 것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_148 또한 여성은 남성과 같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기 보다는 ‘건강한 신체, 열렬한 애국심’으로 충만한 남성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간접적인 방식_150 으로 참여 할 수 있었다. 이 동일화와 소급의 장을 벗어나는 모든 개체들은 약하고 악한 존재들로 규정되고 결국 위생학은 건강과 질병의 대립으로 시작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분할까지 포괄함으로써 불결함과 질병을 도덕적 타락과 연관 짓는 표상의 연쇄들을 만들어낸다._150

 

그렇다면 기독교를 바라보는 그 시대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저자가 인용한 논설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사람마다 예수교만 실노히 믿을 지경이면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장유와 붕우 사이에 의리와 정의가 있어 일국의 태화세계가 될 터이니 우리나라 동포들은 힘써 예배당에 찾아가서 전도하는 말도 자세히 듣고 성경도 많이 보아 모두 진정으로 믿는 교우들이 되어서 나라를 영미국과 같이 문명부강케 만들기를 우리는 진실로 바라노라_매일신문 1898 5월 28일자, 논설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는 종교까지도 ‘부국강병’이라는 목적으로 ‘수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어법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하에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무시되고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현재 상황과 오버랩 된다. 요즘 신문에 실린 기사를 한번 보자.

 

경제개발 40여 년 만에 한국의 청소년들은 세계적인 명품이 되고 있다. 평균 신장은 중국·일본보다 크고 유럽의 이탈리아와 비슷하다.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의 선조들에게 이런 유전자가 있었겠는가. 배를 곯으면서도 공장을 돌리고 철을 만들며 중동으로 달려갔던 60~80년대 할아버지·아버지 세대가 이런 명품들을 예약한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피의 사각 링과 땀의 테이블, 그리고 바람의 과녁을 거쳐왔다. 이제 드디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자 피겨 얼음판’을 정복했다. 김연아의 동선(動線)에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경이로운 발전이 숨어 있다. 김연아의 가냘픈 몸에 쉬지 않고 달려온 대한민국의 거친 숨결이 숨어 있다. 어느 다른 나라에 이런 드라마가 있는가.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 [김진 시시각각] 홍수환·박세리, 그리고 김연아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이라는 개념도 그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매스컴에서도 ‘다문화 가정’이나 ‘다문화 시대’라는 문구를 선전하고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박혀있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심급에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차이에 대해 환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