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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영화

현재 진행형의 블랙코미디_하녀

 

 

 

 

영화는 한국 도시 속의 여성들을 카메라로 비추며 시작한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노는 여자들 술을 마시고 음식을 즐기는 여자들도 보이지만 대부분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보인다. 서빙을 하는 여성,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는 여성 그리고 음식점 주방에서 조리를 하는 여성들. 그들에게 담배를 피우는 자투리 시간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24시간 쉬지 않고 노동을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돈은 쥐꼬리 만큼이다. 그들이 이러한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광경 속에서 어느 여성이 옥상난간에서 투신 한다. 그리고 뼈가 아스팔트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일 뿐, 한 여성의 죽음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된다. 아무도 그녀가 왜 옥상에서 떨어져야만 했는지 주목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그녀의 죽음은 다시 채워질 수 있는 단순한 노동력의 상실(마이너스 1)을 의미할 뿐 그 이외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녀를 기억해 주는 것은 도로 위에 하얗게 그어진 스프레이 자국과 검붉은 핏자국뿐이다.

 

"남에게 예의바르게 하는 게 남을 높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 내가 높아지는 거라고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음식점에서 일하던 은이는 유아교육과를 나왔다는 이력 때문에 최상류층 가정의 하녀로 들어간다. 은이가 조심스럽게 들어간 집은 온통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고 벽에는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걸려있다. 그 속에 사는 이들은 매일 일류 요리를 먹고 고급 와인을 마시며 예술을 향유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그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유한계급(leisured classes)을 정의하고 그들의 '과시적 소비'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한계급은 스스로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며 여가를 즐기며 살아가는 계층을 일컫는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적 약탈 능력이 뛰어날수록 존경을 받는다. 원시사회에서는 약탈의 능력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대중들의 존경을 불러일으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유한계급은 무가치해 보이는 것에 대한 천문학적인 소비 행위와 여가활동을 통해 그들의 약탈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과시적 소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 가족들은 전형적인 유간계급들이다. 남편 훈은 아침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부인 해라는 여유롭게 요가를 한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문화예술 교육을 받은 딸은 "베토벤 좋은데요?"라며 훈의 연주에 응답한다. 그리고 그들은 별장에서 가족들과 우아하게 휴가를 보낸다.

하지만 그들의 고상한 생활 이면에는 썩은 내나는 동물적 탐욕만이 있을 뿐이다. 집주인 ""은 돈, 명예, 권력을 모두 가진 남자이다.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이면 쉽게 가졌고 싫증이 나면 아무거리낌 없이 버렸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모두 그랬다. 훈의 아이를 임신한 "해라"는 그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훈이 가진 권력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의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 해라는 자신의 딸조차도 돌보지 않고 하녀인 은이에게 맡겨 버린다. 그들에게 법과 도덕은 약자들의 변명일 뿐이다. 훈이는 은이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만 그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강한 소유욕일 뿐이다. 장모 앞에서 "당신 딸이 낳아야만 내 애인 것 같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에서 훈이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씨앗을 없애려고 한 두 모녀의 행적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자신의 허락도 없이 건들인 행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은이 자궁 속에 있는 태아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나한테 참 불친절해. 이놈의 세상."

 

 

이 집에서 노동하는 여자는 은이와 늙은 하녀 병식뿐이다. 그들은 약자, 그리고 이 사회의 노동자들을 대변한다. 안주인 "해라"는 화장대에 앉아 자신을 꾸미는 일에 몰두하지만 은이는 주인들이 몸을 씻을 욕조를 청소해야 한다. 그 상황을 못 참겠으면 나가면 된다. 당신을 대체할 노동력은 밖에 넘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노동자들은 인적 자원"일 뿐이다. 은이는 이러한 유한계급의 착취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그 생활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그들의 착취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병식 역시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를 주문처럼 외울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다.

 

 

"나미야 잘 봐. 아줌마를 기억해줘."

 

 

유한계급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 사실에 눈뜨지 못하게 하여 현 구조를 유지하려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사전에 막기 위해 애국심·민족주의·군국주의, 제국주의 등을 이용하여 문화·사회적으로 통제를 하거나 경쟁적 소비 또는 소비주의를 만연시켜 금전적 문화에 순응하게 만드는 정서적·이념적 통제를 사용한다. 이러한 통제된 군중의 모습은 어느 여성의 자살에 무관심해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극명이 들어난다. 감독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자각시킬 것인가?"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관객의 분노를 상승시키는 전략을 채택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은이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나 복수할거에요." 하지만 거대하고 공고한 성벽 앞에서 어떻게 불가능해 보이는 복수를 한단 말인가? 결국 감독은 혼령을 만드는 일을 선택한다. 너희 같은 괴물들 앞에서 혼령이 되어 남아 주겠다고. 마치 수십 년 전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는 슬프게 말한다. 기억해줘. 그 슬픈 불꽃을.

 

 

 

P. S

 

밤늦게 영화를 보고 영화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건물 바닥청소를 하시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왜 이리 안쓰럽고 서글프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배우들 몸매와 연기가 어쨌다는 둥 또 결말이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는 둥의 말들만 늘어놓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는 올라갔지만 이 씁쓸한 블랙코미디 영화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