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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수필과 소설

길을 묻는 철학자_엄정식_삶에 대해서 철학하기

길을 묻는 철학자
국내도서>시/에세이
저자 : 엄정식
출판 : 문학과지성사(잡지) 200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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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왜 이 책의 제목을 ‘길을 묻는 철학자’로 지었을까. 책을 다 읽은 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외침을 책 속에서 여러 번 언급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길’이란 ‘자아를 찾아 가는 여정’이라는 은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는 보물을 찾는 것처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자아’는 숨겨진 보물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다. ‘자아’는 찾아 주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계속 변화할 수 있는 ‘능동적 개념’이다. 절대 목표점을 향해가는 ‘목적론 자아’가 아니라 고정된 목적지가 없는 ‘과정의 자아’라 하겠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지구의 역사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틀어 보면 지금과 전혀 다른 생물군이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으로, 내 인생의 시간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틀면 지금과 전혀 다른 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삶’이라는 여정을 떠나는가? 나는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믿는다. 저자는 행복을 ‘개인적 차원에서의 만족감’으로 한정짓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만족스런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윤리적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개인의 행복’은 ‘윤리적’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개인의 행복이 반드시 윤리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한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가 수행하는 프로젝트가 핵무기를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자. 그의 성과는 동료 과학자뿐만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기관에서고 크게 인정받고 있다. 아마 그 과학자는 상당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핵무기가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는 데 쓰인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어떤 이는 만약 그 과학자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죄책감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 주변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관계에 대해 다 인식할 수는 없다.

 

 ‘제로섬 사회(Zero-sum society)’라는 말이 있다. 투기꾼이 부동산 투자를 해서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면 그 행위로 인해 그만큼의 피해를 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결국 사회적 효용의 가치는 제로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일까? 결국 저자는 행복의 정의를 통해 ‘행복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철학은 가르칠 수 없고, 다만 철학하기를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철학은 당장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기준틀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학문이다. 철학하기란 자명한 것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바로 ‘자아’를 찾는 삶이고 그것이 길을 묻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