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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영화

공간으로 읽는 영화 건축학개론_건축학개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첫사랑은 현재진행형이라기 보다는 과거 완료형이다. 여기서 과거 완료형이라는 말은 첫사랑은 대부분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첫사랑은 기억 속에서 살아 숨쉬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렇다면 그런 기억들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 그리고 공간일 것이다. 그래서 영화 건축학 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애잔한 감성적 이야기임과 동시에 공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건축학개론을 연출한 이용주 감독은 연세대학교 건축과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전작인 불신지옥에서는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지하부터 옥상까지 다양한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그리고 이번에 연출한 건축학개론 역시 그의 전공답게 우리가 사는 공간 특히 서울이라는 공간을 도시적으로 그리고 건축적으로 잘 다루고 있다.

 

 

 

강남과 강북

 

강북과 강남이 나뉘어져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적 특성 

 

 

모두 다 알다시피, 서울은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뉜다. 많은 한강다리들이 이 두 공간을 간간이 이어주기는 하지만 이 두 공간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 남녀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는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교수는 칠판에 큰 서울 지도 하나를 붙여놓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여기서 너희 집까지 오는 길을 한번 표시해보아라.” 이 장면에서 강남 사람과 강북 사람의 특성이 나뉜다. 부잣집 아들에 옷도 잘 입고 잘생긴 건축과 선배 재욱은 강남에 산다. 강남개발로 인해 신흥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강남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다. , 재욱 선배는 강남 사람들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순수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속물적인 사랑이다. 강남이라는 공간도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역사나 시간을 사랑하기 보다는 그 공간이 나타내고 있는 물리적 가치 즉, 환전가치를 사랑한다.

 

반면에 남자주인공 승민은 강북에 위치한 정릉에 산다. 어머니는 오래된 재래시장에서 순대국을 파신다. 승민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강북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강북이라는 공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강북은 시간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곳이다. 정릉이라는 공간은 조선시대의 역사까지 떠올리게 하는 그러한 장소이다. 옛 서울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한강은 서울의 중심을 흐르지 않고 바깥을 흘렀다. 다시 말해 옛 서울은 지금의 강북이다. 그만큼 강북은 시간의 켜가 두꺼운 공간이다. 하지만 강북은 그 시간의 켜가 얇다. 강남은 산업화 1970-80년대 만들어진 새로운 서울이다. 옛 강북의 공간 구성원리가 풍수지리와 성리학적 철학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면 자본에 의해 개척된 강남의 공간 구성은 철저히 자본의 철학 아래에 건설되었다. 따라서 영화에서 남녀주인공인 승민과 서연이 서로의 추억을 쌓아가는 곳은 정릉인 것은 바로 이러한 서울의 공간적 특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승민과 서연에게 강북이라는 공간은 시쳇말로 후지지만 그 둘만의 시간이 쌓여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 둘이 첫 눈 오는 날 만나기로 했던 폐가라는 장소

 

 

서연이 불쑥 들어간 폐가에는 그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가 남겨져 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공간에 담겨있는 기억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이 폐가는 다시 주인공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장소로서 역할을 한다.

 

 

 

 

공간과 장소 그리고 기억

 

 

30대 중후반의 건축가가 된 승민에게 어느날 갑자기 첫사랑 서연이 찾아온다. 그리고 생뚱맞게 옛추억을 되세기며 말한다. “내 집 지어줘.” 건축가가 된 승민은 건축가라는 직업적 특성에 맞게 프로세셔널해보이는 전문 용어로 새로 지을 집에 대한 컨셉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세련된 컨셉의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리니어한 사이트 특성에 맞게 매스를 길게 펴고, 공간의 다양성을 위해 스킵플로어를 두고 그 공간의 중심에는 보이드를 둠으로써....음 이해가 안돼?”

음 더 쉽게 이야기 해주면 안되? 하나도 이해가 안가는데?”

 

그녀에게 제주도 집은 특별하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키가 자랄 때마다 아버지가 표시해두었던 흔적들. 그리고 그녀의 조그만 발이 찍혀져 있는 수돗가. 그 곳에는 지금은 없지만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있는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솔직히 말하면 건축가의 입장에서는 옛 집을 다 부수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디자인 하는 것이 훨씬 쉽고 효율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승민은 서연이의 옛집을 다 허무는 대신, 옛 집에 새로운 공간을 중첩시키는 디자인을 내놓는다. 최대한 옛 집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새로운 집을 겹쳐놓는 디자인.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 없이 현재 그리고 미래도 없다는 건축가들의 소명 의식이 담겨있다.

 

 

시간의 켜가 보이는 강북의 공간

 

 

 그러나 현재 서울은 어떠한가. 승민의 어머니가 평생 몸담고 살아온 재래시장은 뉴타운 재개발로 인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뉴타운이라고 부르는 사업은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다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공간을 폭력적으로 구축한다. 그것은 자본이 만든 공간이기에 사람들의 향기가 나지 않는 공간이다. 먼 훗날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옛 장소가 모두 사라지고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고층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서울이라는 공간은 기억이 쌓이는 시간보다 쓸려 내려가는 시간이 빠른 공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기억이 존재하려면 필연적으로 장소(place)가 필요하다. 장소는 기억이 사는 고향이며 삶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울에 대한 어느 건축가의 탄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축은 반역이다_함인선 중에서

 

 

그래 서울은 망가졌다. 그 동안 우리는 서울을 도시로서가 아니라 부동산으로 대접했고 장소(place)'가 아닌 공간(space)'으로 여겼다. 경제가 역사를 잡아먹는 것을 부추겼고 효율의 이름으로 인간성이 말살되는 것을 방관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난만을 늘어놓아도 좋을 만큼 우리 스스로는 과연 청교도 같은 삶을 살았는가도 따져보아야 한다. 토지의 기운을 빨아 과실이 열렸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그것을 탐닉하였고 부수고 새로 짓는 일을 거듭할 때 발생하는 짭짤함에 만족하지 않았던가?_175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켜켜이 쌓여 내려온 도시와 역사를 봄날 하루 밭고랑 갈 듯 엎어 버렸다. ‘장소(place)'에서 장소성(genius loci)’이 제거되면 그곳은 단순한 공간(space)'이 되고 만다. 장소성이 없는 백색 공간은 정신병동과 다름없다. 도시 전체가 몰역사적인 백색 공간으로 변해 가는 이 시대의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나 역시 나의 정체를 해체하여 무한한 익명성 속으로 숨는 것 말고는 달리 아는 바가 없다._180

 

 

 

 

 

건축가는 옛 장소에 새로운 시간의 한 켜를 더 세웠다. 이 공간에서 서연은 옛 기억을 토양삼아 새로운 기억을 키워나갈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명제는 이 영화에서도 적용된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들의 마음 속은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아쉬움보다는 마음 속 어딘가에 따뜻함이 자리 잡는다그것은 아마도 승민이 서연에게 준 마지막 선물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곡 기억의 습작처럼 승민이가 첫사랑 서연에게 선물한 것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세상 속에 상처받은 그녀가 옛 추억 속에서 치유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였다. 사랑이란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너무도 급속하고 옛 것들과 그 기억을 부수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하고 추구해야할 것은 눈앞에 보이는 물리적 이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건축학개론 (2012)

8.6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조정석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18 분 | 201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