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다/도시와 건축

건축은 반역이다_함인선_건축 구조 전공 건축가가 본 건축은?

건축은반역이다
카테고리 기술/공학 > 건축/인테리어
지은이 함인선 (서울포럼, 1999년)
상세보기


‘건축’은 본래적으로 ‘반역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과의 합일, 화해의 길을 포기하고 자연의 속성을 알려고 그것의 힘을 극복하려는 것을 첫 번째 임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_14

 

건축은 자연과 동일체였던 인간이 ‘자아(주체)’를 만들면서 ‘자연(객체)’를 정복하려는 일종의 욕망이요 의지이다. 거대한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건축은 함인선 교수의 말대로 자연에 대한 반역일 수밖에 없다. 그 반역이 성공하여 건축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모든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자연은 중력, 바람, 물, 지진, 열 등 온갖 것으로 건축을 파괴하려 한다. 자연은 중력, 바람, 물, 지진, 열 등 온갖 것으로 건축을 파괴하려 한다. 구조란 자연이 제공하는 재료를 이용하여 오히려 자연의 힘을 이겨내는 전략이다._18

 

내가 대학에서 배운 건축사는 엄밀히 말해서 건축 구조사였다. 내가 건축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기 때문인지 건축사를 가르치신 교수님은 구조적 관점에서 건축의 발전을 설명해주셨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실내 인테리어나 파사드(입면)을 신경 쓰고 집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집을 부수려는 자연에 맞서 서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 목표였다. 건축기술 진보의 역사는 정확하게 건물에 있어 ‘살과의 전쟁사’에 대응한다. ‘보다 높고 보다 넓은 공간’을 ‘작고 보다 가벼운 재료’로 구축하는 것, 이것이 시대를 통틀어 모든 건물을 짓는 자들의 한결같은 목표다._58 파리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에펠탑도 그 시대의 최고의 기술력으로 구축한 기술의 결정체였다. 우리가 교회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고딕양식도 돌(재료)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어 극한으로 밀고 나가 중력과 싸운 그 흔적에 불과하다. 인간은 거대한 구조물을 구축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했다. 고딕성당을 지을 때 거푸집을 때는 작업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수행하는데 사형수들을 썼다고 한다.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 믿었다나? 돌과 나무를 주로 건축 재료로 사용했던 고대를 넘어 근대에 들어오면서 건축 재료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게 된다. 바로 산업혁명으로 인해 철을 건축 재료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의 발명, 이것은 건축사의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철근 콘크리트는 중력의 하중을 가볍게 이겨냈고 구조에 영향을 받던 형태의 표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건축의 발전은 사회의 발전과도 맞물린다. 절대 왕정시대의 건축은 귀족사회의 엘리트 문화와 사회정치 구조를 들어낸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철의 대량생산은 어떻게 사회와 건축을 변혁시켜 왔는가? 큰 강과 계곡을 건너지르는 철교를 놓고 기차를 보냄으로써 시공간은 혁명적으로 압축되었다. 또한 건축물들이 투명하면서도 넓은 실내공간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대중을 위한 공간 개념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지금껏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공간이동의 자유, 거래와 집회의 자유를 많은 사람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건축가들이 근대 기술에 열광하며 거기에서 싹터 오르는 민주주의의 힘을 본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다. 단순한 건축 재료의 변화라는 면으로만 보아서는 뚱뚱한 압축재로부터 날렵한 인장재로의 변환(양의 차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은 소수로부터 다수로의 권력이동(질의 차이)이었던 것이다._66 건축 역사에서도 변증법적인 양질전화의 법칙이 적용된다. 건축은 자연과 투쟁의 연속이다. 그래서 건축은 발전하고 진화한다.

 

‘타자성’이란 나의 아이덴티티이다. 이는 세기말을 사는, 그것도 지적 식민지인 한국 땅에서 사는 지식인이라면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자기 정체이다. 그 어떤 것도 궁극적 대답이 되지 못하는 이 시대에는 ‘아니다’의 거듭된 반복만이 견성에 이르는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나의 건축은 불온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정직한 것이라 믿는다. 시인 김수영이 말한 바대로 모든 문화란 본래적으로 ‘불온한’것이 아니던가?_53

 

저자 함인선 씨는 한양대 객원 교수였다. 아쉽게 기회가 닫지 않아 그 분의 수업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 분의 강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다른 저작들도 직접 사서 읽어보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그의 삶이 그의 건축처럼 투쟁의 역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건축계의 이단아라 자청한다. 설계가 아닌 구조를 전공했고 그럼에도 건축사를 취득해 33세 되는 해 서울시 건축 금상을 수상하게 된다. 사람은 목소리와 문체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문체는 그가 추구하는 건축처럼 군더더기 없고 논리적이다. 그는 아름다운 건축이란 구조적으로 합리적이고 최적화된 건축이라고 한다. 즉, 구조적으로 합당하면 그 건축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건축은 예술과 공학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합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순이 생길 수 있다. 그는 예술의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아방가르드(avant-garde)이어야 하고, 공학적으로 타당하기 위해서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리얼리스트(realist)가 되어야하며, 사회적 임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이 명확한 이데올로그(ideologue)여야 한다._19라고 말한다. 결국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건축 아카데미즘을 뒤엎는 반역을 꿈꾸는 건축가 그리고 생사를 가르는 병마를 종교의 힘으로 이겨낸 건축가 또한 ‘청년 건축인 협의회’를 통해 건축운동을 사회로 끌어낸 건축가. 그가 건축가 함인선인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삶의 혁명과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리얼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의지와 삶을 보면서 현실과 싸우지 않고 타협하고 안주하려고 했던 내 부끄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건축가다. 그러나 건축물에 자아를 투상 시켜 자신의 분신을 만들려는 것이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라면 나는 건축가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건축가 없는 건축’을 지향하고자 한다. 내가 ‘자아가 없는 건축’을 말하는 것은 서양의 근대주의와 그것을 무조건 숭배하는 이 땅의 식민성에 반항하기 위함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만 구원이 있는 종교는 과학보다 더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제도적 기독교의 시각에 의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나는 삶의 경계가 아닌 ‘삶의 중심’에서 신을 만나려 하며, 과학과 기술을 ‘친구’로 맞는 교회를 구현하려 한다.

 

나는 기꺼이 좌파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성을 하찮게 여기는 역사결정론과 사회를 위해 개인은 희생할 가치가 있다는 식의 전체주의자를 좌파라 한다면, 나는 결코 좌파가 아니다. ‘인간’이 소거된 ‘과학’은 얼마나 야만스러운 모습인가?

 

나는 자본가의 대리인이다. 나는 자본가는 아니지만 자본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건축을 만드는 대리인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의 위력은 인정하되 존경하지 않으며, 자본주의는 혐오한다. ‘자본’과 ‘자본주의’는 별개의 문제다.

 

_“나는 행복하면 불행하다 : 건축가로서의 나의 투쟁” 중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서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서울 토박이다. 그는 서울을 망신창이라고 부른다. 성숙하지 못한 자본주의에 의해 그리고 효율이라는 시대정신에 의해 서울은 망가졌다. 그래 서울은 망가졌다. 그 동안 우리는 서울을 ‘도시’로서가 아니라 ‘부동산’으로 대접했고 ‘장소(place)'가 아닌 ’공간(space)'으로 여겼다. 경제가 역사를 잡아먹는 것을 부추겼고 효율의 이름으로 인간성이 말살되는 것을 방관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난만을 늘어놓아도 좋을 만큼 우리 스스로는 과연 청교도 같은 삶을 살았는가도 따져보아야 한다. 토지의 기운을 빨아 과실이 열렸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그것을 탐닉하였고 부수고 새로 짓는 일을 거듭할 때 발생하는 짭짤함에 만족하지 않았던가?_175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켜켜이 쌓여 내려온 도시와 역사를 봄날 하루 밭고랑 갈 듯 엎어 버렸다. ‘장소(place)'에서 ‘장소성(genius loci)’이 제거되면 그곳은 단순한 ‘공간(space)'이 되고 만다. 장소성이 없는 백색 공간은 정신병동과 다름없다. 도시 전체가 몰역사적인 백색 공간으로 변해 가는 이 시대의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나 역시 나의 정체를 해체하여 무한한 익명성 속으로 숨는 것 말고는 달리 아는 바가 없다._180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는 식민시대의 수난과 개발시대의 성장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탐욕으로 중병을 앓고 있다. 이는 도시만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사람들도 자본과 효율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역사와 환경 그리고 공동체를 생각하기 보다는 개발이익에 집중하고 문화를 과시의 수단정도로 생각한다. 저자는 “도시를 여러 정치세력이 공간을 둘러싸고 벌이는 투쟁의 결과물로 보는 정치경제학적 시각에 동의하는 나로서는 이 꼴이 된 우리의 도시, 우리의 서울에 투덜대기보다는 이렇게 만든 배후의 ‘힘’을 궁금해 하고 그와 싸우는 방법을 찾는 것이 화급한 일일 수밖에 없다._20” 고 말한다. 결국 서울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건축가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클라이언트 더 나아가서 사회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 과정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사시대 움집에서 바벨탑 그리고 현대의 초고층 건축물이 들어서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듯이 사회는 점진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른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불가능한 꿈을 가지자_체 게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