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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여행자'다. 그리고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 brand new life"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떤 영화 제목이 더 어울릴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더니 "여행자" 보다는 "A brand new life"가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영화는 새로운 삶과 맞닥들이게 된 한 소녀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자'라는 제목이 함축하는 바도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에 유효하다.)
주인공 진희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 맡겨진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아버지는 진희에게 함께 여행을 가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진희는 아버지가 자신을 다시 찾으러 올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새로운 삶과 부딪히곤 한다. 이 영화의 감독 '우니 르콩드'는 실제로 프랑스로 입양된 입양아다. 그녀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타국으로 입양되어 한국에 이방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영화 속에는 그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원치 않는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새로운 삶을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을 가지고 영화는 진희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보육원 아이들은 항상 이별을 준비한다. 새로운 타국의 부모를 만나는 일은 어떤 이에게는 행복한 삶이 기다리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막힌 터널을 지나가는 것같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영화는 큰 갈등이나 사건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별을 겪는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조용히 그리고 절제하여 보여준다. 나뭇가지 덩쿨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진희의 모습, 불편한 몸 때문에 좋아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예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보육원을 쓸쓸이 떠나는 뒷모습 그리고 이러한 서러운 인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의 눈물 속에서 우리는 이별의 터널을 통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아픔과 만난다.
감독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일'을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의 유사성과 병치시킨다. 진희는 함께 떠나자던 숙희가 홀로 보육원을 떠나자 다시 세상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땅에 묻는다. 이런 진희의 행동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땅 속 묻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희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노래 '당신을 모르실꺼야'를 조용히 부른다.
"당신은 모르실꺼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는 뉘우칠꺼야..."
그리고 프랑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싣는다. 공항을 나서는 진희의 발거름에는 아홉 살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삶이 밟힌다.
이렇듯 <여행자>는 아홉살 소녀 진희의 모습을 통해 사랑하는 것을 잃는 슬픔과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삶은 이별과 만남의 반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항상 아프고 서늘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겪어야할 삶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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